7월달에 강릉 신경과에서의 한달 후 서울 생활을 하다가 인턴 마지막 달인 2월 다시 강릉을 찾았다. 이번달은 강릉 외과에서 한달을 보냈다.

이전 글에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수술방을 정말 싫어한다. 무엇이 구체적으로 싫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쉽사리 구체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수술방 갱의실 공기부터 그냥 싫은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수술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수술이야말로 근본적인 의학적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막상 수술에 들어가면 늘 신기한 눈빛으로 스크럽을 서곤 한다. 어쨌든 수술방 분위기가 싫어 되도록이면 수술방과 멀리하는 인턴 생활을 보냈다.

가능하기만 했다면 이번 턴도 다른 턴과 바꿨을 것이다. 하지만 수련 규칙상 외과를 한번 이상 꼭 돌아야했고 이전에 있던 서울 외과를 모두 다른 과로 바꾼 내게 남은 외과가 2월 강릉 외과 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발걸음을 강릉으로 향해야 했다. 물론 강릉 외과를 서울 외과로 바꾸려는 시도도 해볼 수 있었지만 내공이 썩 좋지 않은 내 모습을 볼 때 서울에서 로딩이 많은 파트에 걸릴 거 같기도 했고 당직 때도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가 많을 것 같아서 그냥 강릉으로 오기로 했다.

강릉 외과 첫주는 유방 파트 주치의로 시작했다. 일명 보릿고개라고 불리는, 졸국을 앞둔 선생님들이 전문의 시험을 위해 병원을 잠시 비운 시기였기에 전공의 수가 모자라 인턴이 주치의를 맡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전달 선생님들이 한달 내내 주치의를 했지만 나는 일주일만 버티면 되었고 교수님과 전문간호사 선생님의 보살핌(?) 아래에 큰 어려움 없이 일주일은 보냈다.

서울 외과보다 강릉 외과를 오고 싶었던 또다른 이유는 하나의 파트가 정해지면 해당 파트의 수술만 계속 보는 서울과 달리 강릉은 인턴의 파트가 정해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난 마음을 먹지 않았다!) 온갖 수술을 다 볼 수 있다. 맹장염, 담낭염 수술은 기본이고 당직 때마다 터지는 복막염 개복 수술은 강릉 외과의 피할 수 없는 매력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외과 인턴이 정형외과 당직도 같이 서기 때문에 운이 좋다면(?) 정형외과 수술도 함께 볼 수 있다. 운이 늘 좋았던 나는 당직 때마다 온갖 수술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주는 설날 4오프를 위해 당직을 바꾼 덕분에 토요일, 일요일 연당을 서게 됐는데 일요일 하루는 해떠있는 동안에는 거의 수술방에만 있었던 것 같다.

뭐, 어쨌든 결론적으로 다양한 수술을 볼 수 있어 좋았던(?) 한달이었다(아직 일주일 남았지만…). 연당도 해보고 말이다. 계속해서 말하지만 내가 수술방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감명깊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병원 인턴 생활이 끝났다.
인턴 1년이 끝났다. 나에게도 인턴 끝이 올까 싶었지만 이제 일주일이면 인턴으로서의 역할이 끝난다. 만약 인턴을 한번 더 하라고 한다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차라리 의사 면허를 반납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볼 것이다. 따스하기만 했던 학교의 품을 떠나 병원의 밑바닥에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 인턴 아래는 병원 바닥이라는 말답게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삶이었다.
인턴이 일을 직접 하긴 하지만 정작 인턴은 그 이유를 모르고 하는 이유가 많다. 예를 들어 CT 동의서를 받으러 갈 때 이 환자가 왜 CT를 찍는지 인턴은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물론 시간과 열정이 허한다면 환자 기록을 일일이 찾아보며 장황한 설명과 함께 동의서에 서명을 받아도 되긴 하지만 인턴에는 시간도 열정도 허락되지 않는다. ABGA를 하면서도, 폴리를 넣으면서도 왜 이걸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환자들로부터 거부당하는 경우도 많으며 심지어는 욕설과 비난을 듣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인턴잡의 또다른 특징은 ‘어떻게든 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려면 인턴 시키면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인턴은 상급자가 지시하는 사항을 꼭 해내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 술기를 하다보면 이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일종의 벽을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일단 환자가 협조가 안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환자 신체 구조 혹은 현재 처해있는 상황상 술기를 할 수 없을 때도 많다. 하지만 실제로 못한 경우는 아마 다 세어봐도 손가락 갯수보다 적을 것이다. 그만큼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무언가에 홀린듯이 가장 낮은 곳에서 발버둥치며 치열하게 살았다.
계속 밑바닥, 밑바닥 거리지만 밑바닥에서의 삶이 소중했다고도 말하고 싶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인턴을 하면서 인턴이기 때문에 배운 것들도 많다. 전공의가 되고나면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보게 된다. 이 환자가 검사결과가 어떠했는지만을 볼 뿐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검사가 이루어졌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적절한 기준을 지켜 채혈이 이루어졌는지 혹은 적절한 상황에서 영상검사가 이루어졌는지 등은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 ‘적절함’들이 모두 지켜졌다고 생각하며 환자를 보는 것이 맞겠지만 그래도 그 과정을 인턴을 하며 직접 눈으로 모두 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 큰 서울아산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하기에 앞서 인턴생활을 하며 병원 시스템 전반을 알게된 건 크나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일해보면 정말 병원이 커도 너무 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인턴, 좋았지만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이게 인턴 생활을 끝마치는 나의 한줄평이다. 힘들 때면 한없이 힘들었지만 즐거울 땐 한없이 즐거웠던 그랬던 1년이었다.

카테고리: Medical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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