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두가지 마음 : 이성, 감성

인간은 두가지 정서적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성과 감성, 이것이 그 둘입니다. 이성은 논리력, 사고력 따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적활동을 할 때 쓰이는 영역입니다. 이와 반대로 감성은 사랑, 우정, 미움, 증오, 질투심 등의 감정이 일어날 때 활성화되는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매일매일 이 둘을 적절히 사용합니다. 한 곳에서는 이성을 많이 쏟고 감성을 조금 쓰는 반면 다른 곳에서는 이성보다는 감성을 훨씬 많이 소비합니다.

이 둘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학창시절 내내 해왔던 공부는 이성에 바로 직접 연결됩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영어 단어를 암기할 때, 혹은
과학 원리를 이해할 때 이성적 능력이 사용됩니다. 공부 뿐 아니라 회사나 모임에서의 일처리, 돈문제에 대해서도 활성화되는 성향입니다.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 혹은 노벨상을 받은 수많은 과학자들은 다들 이성적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새로운 과학적 원리를 발견하고 발명하는 것은 고도의 지적활동에 요구되는 엄청난 이성적능력이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간단히 말해 우리가 평소에 낮에 하는 일은 이성을 요하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성은 대체로 그 양이 줄어듬이 없습니다. 배웠던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리긴 하겠지만 하루동안 이성의 변화량은 매우 적습니다. 하루동안 배울 수 있는 지식의 양도 한정적이고 오랫동안 단련된 지식이라면 쉽게 잊어버리지도 않을테니깐요. 결국 이성은 나이를 먹을수록 꾸준히 증가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감성과 연관됩니다. 감수성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성향이며 연민, 시기, 책임감 등 역시 감성이 관여합니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면 연애가 감성의 절정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요약하자면 밤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하는 활동들은 감성을 요하는 활동들입니다.
감성은 사람마다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양이 정해져있습니다. 또한 마치 물질적인 것처럼 얻기도 하고 소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감성을 받는 것이고, 반대로 내가 말하면 감성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감성을 주고 받는 양이 일치할 때 인간은 행복감을 느낍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감성을 쏟은만큼 그 사람도 나에게 그만큼의 감성을 전달해주어야지 만족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애인에게 값비싼 선물을 하였을 때 상대방이 별 고마움 표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감성을 준만큼 받지 못한 꼴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선물을 준 사람 입장에서는 감성을 잃은 것이고 기분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감성의 양이 줄어들 수는 있지만 그것은 마치 컵에 든 콜라와 같아 일정량을 넘지는 못합니다. 때때로 감성이 넘치는 듯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연애초기 모든 것이 행복한 연인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감성은 콜라와 같아 넘친 감성은 결국 거품입니다. 거품이 사그라드는 순간 그 행복감마저도 단번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감성의 하루 최대치는 정해져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이미 언급한대로 개개인마다 다르며 날이 지날수록 최대치가 조금씩 변하기도 합니다. 매일매일이 우울한 사람에게 이 최대치는 점점 감소합니다. 이 양이 계속 감소하다가 0이 되는 순간, 인간은 우울증 심하면 그로 인한 자살로까지 이어진다고 생각됩니다.

 

시대 변화에 따른 감성 소통

사실 이성은 삶의 만족감 측면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연구나 발명의 성공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성은 정말 중요한 요소이지만 평범한 일반인들에게는 어느정도의 이성만 갖추고 있다면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감성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삶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감성을 꼭꼭 감추고 내놓지 않는다면 결국 다른 사람들도 외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감성을 마구잡이로 뿌리고 다닌다고해도 뒤에서 욕먹기는 다반사일 것입니다. 감성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시작해오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로 큰 작용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들어 인터넷 및 각종 통신 매체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감성의 소통이 과거와는 현저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감성 소통을 살펴봅시다. 통신 매체가 발전되지 않았던 예전의 감성소통 방법은 오직 face to face, 즉 다른 사람들을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즉 해가 뜬 낮에 대부분의 소통이 이루어졌으며 밤에는 제한적인 장소와 제한적인 사람들과의 감성소통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의 대부분 감성소통은 밤에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일과 공부로 바쁜 현대인들은 오히려 밤에 더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물론 예전처럼 밤에 만나서 교감을 나누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보다 메신저로 소통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증하였습니다. 즉, 다시 말해 감성교환의 방식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방식, 수 뿐만 아니라 속도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진득하고 느긋하게 이루어졌던 예전과 달리 빨리 끓고 빨리 식는 식의 관계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를 가리켜 인스턴트 사랑이라는 말도 등장하게 되었구요.

메신저를 이용한 감성 방식은 그럼 무슨 문제라는 건가요? 언제든지 손쉽게 소통할 수 있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어도 연락할 수있으니 좋은 것 아니냐구요? 마냥 좋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과 대화를 할 때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표정과 억양, 목소리의 톤, 몸짓들을 함께 느끼게 됩니다. 이를 비언어적 표현, 반언어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문자나 채팅을 할 때면 이러한 비언어적, 반언어적 표현들을 전달할 수가 없게 됩니다. 통화를 한다해도 역시 다른 사람의 표정, 몸짓 등은 볼 수가 없습니다. 결국 직접 만나지 않고는 완전한 형태의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정보전달 목적의 연락이라면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진정 큰 문제는 이러한 수단들을 통해 감성을 교환한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의사소통으로 감성 전달이
온전히 될 리가 없습니다. 이 점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너 참 돼지같다.’ 라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밥을 정말 먹음직스럽게 먹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귀여워서 돼지 같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정말 식탐이 문젯거리가 되는 친구를 보며 돼지 같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얼굴을 보며 이야기할 때 상대방이 어떤 말투로 말을 하는지, 무슨 의도를 품고 있는지가 분명히 전달 됩니다. 그러나, 만일 채팅으로, 즉 텍스트로만 전달을 한다면… 과연 원하는 의도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만에 하나, 이 과정에서 마찰이 생기기라도 하면 내가 전달한 감성은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공중분해 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둘 사이의 감성의 공백이 생기게 되고 서로 불쾌한 감정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인터넷 매체 및 통신 수단은 서로의 사랑과 우정을 어디서든 돈독히 해주는 훌륭한 수단임은 분명하지만 결국에는 이를 통한 감성의 주고받음에서 생긴 갈등의 씨앗이 자라나 결국 진정한 인간관계의 파멸까지 이르는 일도 허다합니다.

 

그 사람과 나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감성!

감성을 조절하는 것은 마냥 쉽지만은 않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몸 속에서 빠져나가기도 하며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와 상대방의 감성을 다룰 수만 있다면 인간 사회에서 갈등은 없을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새로운 생각을 하나 더 해보았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잠을 자는 이유가 감성을 충전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늦은 밤 내내 누군가와 싸우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별 일이 아닌 것 같이 느꼈던 적, 다들 경험해보셨을 겁니다. 부부싸움도 같은 맥락에서 칼로 물베기라는 표현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인간의 두가지 대립적인 성향, 이성과 감성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2014년에는 이성을 가득가득 담고 감성 조절에 성공하여 일과 사랑 모두 성공하는 멋진 사람이 되어봅시다 ^ㅡ^

카테고리: My Wri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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