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책임 없는 의료개악(改惡)
의사신문 기고문
http://www.doctor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7063
의대증원 정책 발표 이후 어언 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정부는(정부의 말을 빌려쓰자면) 속도감 있고 흔들림 없이 ‘의료개혁’을 추진해왔다. 아니 추진해온 것처럼 보였다.
의료계의 수 차 례의 반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들의 길이 단 하나의 정도(正道)인 것 마냥 안하무인(眼下無人)의 태도로 일관해왔다. 그런 정부의 기행(奇行)에 제동을 건 것은 다름이 아닌 ‘회의록’이었다.
속도감 있는, 흔들림 없는 의료개악은 사법부의 문제 제기로부터 촉발됐다.
정말 사소한 질문이었으나 그 반향은 꽤 컸다. 의대 정원 2000명을 논한 회의록이 존재하는가. 우스갯소리로 초등학교 회의에서도 회의록을 작성하는데, 한 나라의 중대한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회의의 회의록이 정말 없었을 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에 대해 정부는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 회의록을 제출하겠다고 밝혔지만 그 외 의료현안협의체와 의대정원 배정위원회는 회의록 작성 의무가 없다고 말하며 특히 의대정원 배정위원회는 위원 명단조차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두고 의료계의 여러 문제점을 꼽을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부분에 이번 사태의 핵심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제목에 언급한 것처럼 신뢰와 책임이 그것이다.
먼저, 정부는 신뢰를 잃어버렸다. 만약 정부와 의료계 사이에 견고한 신뢰관계가 구축되어 있었더라면 갈등의 골이 이만큼 깊어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의사들에게, 특히 전공의들에게 본인들이 하는 의료개혁을 믿고 따라오라고 이야기하지만 신뢰감 있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사실 약속을 먼저 어긴 쪽도 정부였다. 2020년 ‘공공의대’ 사태 이후 정부와 의료계는 중요한 약속을 했다.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 간의 합의문 중 1번 사항이 바로 “의대정원 통보 등 일방적 정책 추진을 강행하지 않는다”였다. 하지만 정부는 2월 초, 마치 의료계와 잘 이야기를 끝마쳤다는 것 마냥 의대증원 2000명을 통보해버렸다. 그 이후의 상황은 다들 아는 바대로 ‘집단행동교사죄’를 시작으로 각종 명령과 처벌을 들먹이며 전공의들을 핍박하며 정책을 강행했다. 약속을 어기고 몽둥이부터 든 정부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과연 어떻게 믿음을 줄 수 있을까.
두 번째, 정부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2월 이후 정부는 중앙사고수습본부를 꾸려 각종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추후 결과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려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은 수차례 실패한 의료정책들을 보아왔다. 대표적인 예가 의학전문대학원, 포괄수가제, 문재인 케어 등일 것이다. 포괄수가제는 산부인과의 몰락을 초래했고 의학전문대학원과 문재인 케어는 이미 폐지 및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 추진 당시에도 의사들을 반대의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큰 사회적 이슈를 불러오진 못했고 정책은 추진됐다. 잘못된 정책이 추진되고 폐지되면서 크나큰 사회적 비용이 들었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어떠한 반성의 기색도 보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당시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느 누구도 답변은 커녕 질문조차 하고 있지 않다.
회의록 공개에 대한 문제는 처음부터 꾸준하게 제기되어 왔으나 정부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던 중 사법부의 작은 판단이 정부의 폭주에 제동을 걸었다. 보정심 회의록을 제출하겠다고 밝힌 정부이지만 애초에 회의록 문제가 붉어진 것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년대계의 관점에서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시행해야 할 교육정책을, 그것도 의료교육정책을, 기본 중의 기본인 회의록조차 제대로 제출하지 못하면서 어찌 이것을 ‘개혁’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그저 신뢰와 책임이 바탕이 된, 공정하고 투명한 의료사회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