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과 후기
자교 병원도 비슷하지만 서울아산병원 소아과도 인턴에게는 비교적 편한 스케줄 중 하나이다. 환자가 적다거나 질병이 경하거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전공의로서의 삶은 결코 편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턴에게는 그렇게 일이 많지 않다.
우리 병원 소아과는 인턴이 여러 파트로 나뉘어서 일한다. 소아중환자실(PICU, 인턴들 사이에서는 그냥 피쿠라고 부른다), 신생아중환자실(NICU, 여기는 니쿠), 그리고 각 병동마다 인턴 한명씩 배정되고 소아응급실과 소아진정에도 인턴이 배정된다. 보통 피쿠 인턴이 가장 편한 파트로 인정받고(?) 있고 나는 피쿠 인턴이 되었다.
PICU는 1과 2로 나뉘어져 있고 그중 PICU1의 PCS(소아흉부외과)를 제외한 환아들과 PICU2의 모든 환아들이 내가 맡는 아기들이다. 인계받기로는 피쿠 인턴의 콜은 하루종일 해봐야 5개 정도가 전부라고 하였…지만 첫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일을 시작할 무렵 중환들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애초에 PICU 자리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만 살펴보면 아기들이 왜 병원에 입원해있는지 알 수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기들도 있었고, 소아과 전공의 선생님들의 기록 스킬 또한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아이의 인생 전부가 입원기록에 담겨있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아산 소아중환자실 아기들의 기록을 보며 삶이 이토록 기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일단 선천성 심질환으로 인해 입원해 있는 경우도 많고 듣도보도 못한 이름을 가진 증후군으로 장기 입원해있는 아기들도 있었다. 첫 주에는 뇌사판정 과정에 들어가는 아기도 있었으며 희귀암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는 아기도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병이 생겼는지…
아기들의 병 상태가 워낙 중하다보니깐 상대적으로 인턴이 하는 일이 거의 없는 것이다. 그 덕분에 많은 시간을 다른 일을 하며 보낼 수 있었다. 시험 전까지는 시험 공부를 하였으며 시험 이후에는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한달 간 일 없는 삶을 살다가 갑자기 내일부터 내과 인턴이 되어 무언가를 하려하니깐 몸이 굳어서 잘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피쿠 인턴의 꿀 같은 삶이 몸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남은 기분이다.
이와 별개로 요즘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인간에 대한 회의감에 빠져있다. 젊었을 적… 아니 20살 사회초년생 때부터 있었던 만성질환 중 하나이다. 대체로 연말에 나타나며 무언가에 취해있지 않은 굉장히 애매함 만이 가득한 시기에 생기곤 한다. 일종의 걱정 중 하나이다. 미래에 대한 고민, 과거에 대한 후회, 그리고 현재의 방황이 뒤섞여 만든 복잡한 상태이다.
늘 마음 속에 품고 사는 문구 몇마디들이 있다. 가장 최근에 인상깊게 다가온 문구는 프랑스 시인 샤를 보를레르의 시 ‘취하라(Enivres-vous)’ 이다. 시 말미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시간의 궁색한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늘상 취해 있으라. 술에건, 시에건, 미덕에건, 당신 뜻대로". 말 그대로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열중해 있으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거처럼 느껴진다. 반대로 할일 없이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시간이 무척 느린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내 상태가 그렇다. 취할 대상이 없다보니, 코로나로 인해 술에도 취할 수 없는 상태이다보니 그저 ‘시간의 궁색한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니면 어서 재밌는 일을 찾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