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의 가치

한때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섰던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있다. 젊은 세대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그저 열정이라는 이름 아래 착취당했던 현실을 의미한다. 수많은 논쟁 끝에 우리는 노동의 대가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지만, 의료계에서 전공의들은 여전히 비슷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었다.

전공의들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밤을 새워 환자를 보고 공부하며 성장해왔다. 그들의 희생은 명령이나 보상 때문이 아니라, 의사로서의 도리와 책임감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 가치는 개인의 삶과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는 그것이 의료를 지탱하는 기본이라 믿어왔다. 그러나 이제 그 무형의 가치는 산산이 부서졌다.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났던 내 친구들도 그러한 무형의 가치를 가슴에 품고 전공의 생활을 시작했던 사람들이었다. 다들 각 학교에서 성적이 좋아 소위 ‘인기과’로 불리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과를 택할 수도 있었지만, 돈보다는 더 큰 가치를 추구하며 그곳에 모였다.

새로운 암 치료 방법을 연구하고 싶었던 내과 친구, 소아 마취를 통해 어린 생명을 살리고 싶다던 마취과 친구, 소아 간이식을 통해 아이들에게 새 삶을 선물하고 싶다던 외과 친구, 재건 성형으로 환자들에게 잃어버린 삶의 일부를 돌려주고 싶다던 성형외과 친구, 고위험 산모와 태아를 돌보며 생명을 이어가고 싶다던 산부인과 친구. 그들은 모두 단순히 돈이나 명성을 좇는 것이 아니라, 의사로서의 도리와 사명감, 그리고 환자를 위한 헌신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선택했다.

적어도 그들이 전공을 택했던 시점만큼은, 그런 숭고한 가치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잘못된 정책과 의료진을 향한 악마화, 그리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외면은 결국 이들의 꿈을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이제는 그들이 품었던 그때의 꿈을 다시 꿀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 사회는 의사들의 무형의 가치를 경시하고, 그들을 희생시키는 근시안적인 선택을 했다. 열정과 헌신으로 지탱되던 의료 체계를 스스로 파괴한 결과, 이제 그 대가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라진 무형의 가치는 오로지 돈이라는 형식으로 치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아무리 많은 비용을 들이더라도, 의료진이 가졌던 책임감과 헌신은 되살릴 수 없다. 이 선택의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가 곧 깊이 통감하는 날이 곧 오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