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02

옛 조상들이 왜 속세를 벗어나 풍월주인(風月主人)이 되어 글을 지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에 욕심이 없고 한가로이 지내다 보니 생각이 깊어지고 숙성되어, 쌓이고 쌓인 생각들이 문자의 형태로 넘쳐흐른 것이 아니었을까. 개소리고 사실 그냥 심심해서 글을 쓴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1. 한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서울 아산에 비해 홍천 아산은 대부분을 할 수 없다. Brain hemorrhage, acute MI가 확인되면 지체하지 말고 타 병원 arrange가 필요하며 안과, 이비인후과 등이 없기 때문에 안외상, 코피, 이물 등의 경우 한계가 있다. 세척이나 소독, 콧 속 패킹, 육안으로 보일 경우 이물 제거 등을 해볼 수 있겠으나 패킹으로도 코피 지혈이 안되거나 이물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경우 해당 과가 있는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말해준다. 드물게 응급실로 찾아오는 소아 환자들에게도 해줄 수 있는게 많이 없다.
내과적 care는 병원에서 어느 정도 가능한 편인데 이 경우 나의 한계를 인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복통, 호흡곤란 등의 경우 증상과 질환의 스펙트럼이 매우 광범위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 내가 응급실에서 처리할 수 있는지, 어느 선을 넘어서면 상급의사(과장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기준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얼마전 Hypokalemia case를 마주하였는데 내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한참동안 고민한 적이 있다. Electrolyte imbalance를 마주한 적이 처음이었고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도 mild하였기에 더욱 애매한 상황이었다. 후에 과장님과 이야기해보니 PO를 줘서 돌려보내든 입원을 시키든 큰 상관이 없었겠다고 하셨다. 개인적으로 돌이켜보니 애매한 경우에는 즉시 노티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2. F/U

나의 한계를 느끼고 전원을 보내든 입원을 시키든 그 이후에 어떤 처치가 이루어졌는지, 환자의 상태는 어떤지 매번 궁금함을 느낀다. 시간이 지나 어쩌면 내가 해야할 일이기도 하니깐 말이다. 입원시킨 경우에는 환자 차트를 열어볼 수 있지만 타 병원으로 보낸 경우에는 환자기록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그나마 아는 사람이 있는 몇몇 병원에는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환자 상태가 어떤지 물어보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게라도 지인을 통해 증상이 차차 나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나마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그러한 처치를 할 수 있었다면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도 있다.

3. 술

지난 번에 술 취한 환자에 대해 이야기 했었는데 술에 관련된 이야기는 파도파도 끝이 없을 것 같다.
술 취한 보호자들도 비슷한 특징이 있다. 술 취한 보호자들은 끔찍하게 환자 걱정을 한다. 친구들끼리 술 마시다가 그중 한명이 다쳐서 다같이 병원에 오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들어오면서부터 대뜸 내 친구가 다쳤으니 어서 이것저것 검사 좀 해달라는 식이다. 반대로 다친 환자는 자기는 괜찮다면서 검사, 치료 안해도 된다고 말한다. 보호자가 원하는 그런 ‘정밀검사’를 다 할 필요도 없지만(물론 할 수도 없다) 또 그렇다고 환자 말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더욱 안된다. 둘 사이 어딘가 적정선을 제시하면 또 보호자는 그것밖에 안해도 되냐고 하고 환자는 그것마저 하기 싫다고 한다. 매번 이 패턴이 반복된다. 내가 당한 일은 아니지만, 적정한 검사 및 치료가 끝나고 환자가 이제 집에 가겠다고 해서 나갔는데 갑자기 보호자(친구)가 들어오더니 이것밖에 안해주냐고 화를 내면서 폭력을 휘두를 뻔한 적이 있다.
술 취해서 다쳐서 오면 환자이지만 정말 그냥 단순하게 음주자 상태로 와서 응급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경우도 있다. 역시나 들어오자마자 대뜸 자기가 밥을 못먹었으니 뭐라도 좀 놔달라는 식이다. 검사 좀 해보자고 하면 그건 또 싫고 빨리 수액이나 달라고 한다. 자기 말을 안 들어주면 욕설과 함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대체로 무시하며 제 풀에 지쳐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리는게 답이지만 그런 상황을 마주하면 정말 스트레스가 확 쌓여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다.

4. Epley

Mental change, trauma hx. 없이 심한 dizziness만을 호소하며 내원하면 BPPV를 먼저 생각해본다. Nystagmus가 확인되고 움직일 때 증상이 악화되면 BPPV라 판단하고 Epley maneuver를 먼저 시행해본다. 이전에 PK 실습 때 인상깊게 본 적이 있고 엄마한테도 한두번 해봤기 때문에 처음 BPPV 환자를 마주했을 때도 서슴지 않고 했었다. 첫 환자가 드라마틱하게 좋아졌던 터라 그 이후로도 믿음을 갖고 행하고 있다. 안진의 특성, 방향 등 많은 요소를 고려하고 해야하는 게 맞지만, 아직 내 수준에서는 도저히 그런걸 파악할 능력이 없다. 그저 좌우 정도만 구분해서 하는 식이다. 성공하면 어쨌든 증상은 단번에 호전된다.
문제는 내가 아무리 Epley를 많이 해도 이걸 처방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혹은 내가 처방 내는 법을 모르는 것이거나). 다른 환자들보다 더 시간을 들여서 환자의 몸을 붙잡고 이렇게 저렇게 했는데 환자가 내는 비용은 아마 단순히 주사 맞고 가는 환자들이랑 비슷하거나 혹은 더 적을 것이다.

5. DKA/Trauma

어제 아침에는 DKA 환자가 왔었다. 학생 때 DKA를 공부하며 내가 가졌던 생각은 ‘아, DKA는 일단 hydration+insulin 하면 끝이구나’였다. 어제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달았다. DKA는 매우 위급하고 무서운 상황이라는 것, 1시간 간격으로 e`, bst f/u이 필요하기 때문에 ICU care가 무조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본 환자는 아니지만 밤에는 우측 전신에 걸쳐 pain을 호소하는 환자가 왔었다. 역시나 drunken 상태 trauma로 인한 pain이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pelvis 쪽 깊이 5cm 정도의 stab wound였다고 한다. 바로 전원 arrange를 했고 대충 설명을 듣고 나는 따라가기만 했는데 가는 도중 계속해서 환자가 가슴이 아프다고 하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해서 병원에 전화를 걸어 Abdomen CT(Abdomen 밖에 안찍었다..)에서 lung 부위 좀 봐달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pneumothorax가 확인되었다. 다행히 크기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하나에만 집중해서는 안되겠다는 걸 느꼈다. 앞으로 Trauma 환자가 오면 좀 더 자세히 보는 걸로…

카테고리: Medical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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