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6월 홍천 그리고 7월 강릉 신경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3개월 간이 지방 파견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니 꽤나 감회가 남달랐다. 서울아산병원이 정말 크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고 그 규모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홍천과 강릉에서 참다운 의사생활(?)을 했다. 나의 업무는 대개 술기보다는 판단과 결정이었다. 100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내가 찍은 EKG 횟수는 20회가 채 안될 것이며 넣은 폴리 갯수도 아마 10개 미만일 것이다.

내가 본디 의사가 아닌 노예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48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대충 짐 정리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컬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쩔쩔 매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가 받은 연락은 대개 "선생님, OOO 환자 ~~~ 한데 어떻게 하죠?" 였건만 서울 응급을 시작하고 나서는 "선생님, O구역 동의서랑 ABGA 있어요" 식의 연락만이 온다.

첫주는 매 출근이 너무 공포스러웠다. 3월달 병동 당직을 이틀에 한번 꼴로 설 때만 해도 온갖 술기에 능했다. 동맥혈을 뽑는 데에 거침이 없었고 코줄, 소변줄을 넣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뽑는 족족, 넣는 족족 술기를 클리어했다. 하지만 손보다는 머리를 사용한 3개월 동안 나의 손은 말그대로 퇴화했다. 심지어 코로나로 인해 4종 보호구(장갑, 가운, 마스크, 페이스 쉴드)를 낀 상태에서, 즉 내 손과 내 눈을 온전히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술기를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특히 혈액 배양을 위한 채혈이 크나큰 스트레스였다. 정맥을 찾아 토니켓을 묶고 깨끗하게 소독을 하고 바늘로 찔러 피를 빼면 되는 꽤나 간단한 술기이지만 정맥보다는 동맥에 친숙한 인턴이었기에 바늘을 찌르는 족족 혈관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다시 한번 찔러도 피 한방울 맺히지 않는 나비 바늘을 원망하며 다른 인턴 선생님에게 도움을 구하는 나의 모습이 그렇게 슬퍼보일 수가 없었다.

또 한가지 느낀 건 환자들이 기가 무척이나 세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병동에 몇날 며칠동안 누워계신 환자들보다 일상생활 잘 하다가 갑자기 아파가지고 온 환자들이 대부분일테니 기운이 무척이나 팔팔한 경우가 많다. 병원 환경에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기에 피를 뽑는다고 하면 기겁을 한다. 특히 인턴이 채혈을 할 경우에는 대개 간호사 선생님들이 모두 한 이후에 하게 되는데 채혈을 하고자 환자에게 가면 아까 피 뽑았는데 왜 또 뽑아가냐는 윽박부터 듣고 시작한다. 가뜩이나 정맥도 못 찼는데 그런 불평불만을 듣고나면 더욱 더 위축이 되어 펄떡펄떡 뛰는 정맥에서도 실패하게 된다.

첫주가 매일매일 이랬다. 나는 술기를 못하지, 환자들은 기가 세지, 못하는 와중에 정맥채혈도 해야 하지… 이보다 더한 고난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일하기 싫었다. 그래도 같이 일한 다른 선생님이 술기에 굉장히 능하셨고 내가 채혈 이외 잡다한 일들을 다 처리하는 사이 채혈 위주로 일을 해주셨기에 비교적 무사히 한 주를 버틸 수 있었다.

지금이야 물론 한껏 물올라 있다. 중간에 파업 등의 이유로 혼자서 응급실을 감당해야만 하는 날이 있었는데 그 절박함이 빛을 발했는지 그 이후로는 단한번의 실패 없이 척척 술기를 해내고 있다. 또 하나 태도적인 측면에서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잔뜩 독기가 올라있어서 그런지 더이상 환자들과의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다. 환자들이 "왜 또 피 뽑아요?"라고 묻기 전에 내가 환자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마냥 설명하고 바로 그냥 채혈을 해버린다. 물론 그 와중에 실패했다면 난감했겠지만 정맥이 잘 안보인다면 동맥에서라도 뽑으면 된다는 자세로 임했기에, 실제로도 그랬기에 실패하는 경우가 없었다.

첫 두주는 응급실에 적응하느라 너무나도 정신이 없었다. 응급실 돌며 느낀 많은 생각들은 다음 글에…

카테고리: Medical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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